지역혐오 발언,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인종주의적 혐오발언 대책 마련 국회 토론회 발제문


일시 : 2014년 7월 7일(월) 오후 2시~5시
공동주최 : 박주선 의원(새정치민주연합), 안효대 의원(새누리당), 송호창 의원(새정치민주연합)
주관 : 지역차별극복시민행동

발제자 : 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 고재열 시사인 팀장/독설닷컴 운영자, 안진걸 참여연대 사무처장, 이승훈 새누리당 모바일정당 민간위원, 주동식 지역차별극복시민행동 대표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주동식 지역차별극복시민행동 대표


우리나라 온/오프라인의 혐오 발언은 그 종류와 성격이 상당히 다양하지만 가장 규모가 크고 장기적이며 악질적인 것이 특정 지역 즉 호남에 대한 혐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제 발제는 호남 지역에 대한 혐오 발언의 현황과 심각성을 짚어보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 점, 너그러운 이해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1. 호남에 대한 혐오, 왜 인종주의인가?

(슬라이드 2) 온/오프라인에서 갈수록 심각성을 더해가는 호남 지역 및 호남 출신, 호남의 정치성향에 대한 혐오감의 뿌리에 일종의 인종주의가 자리잡고 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호남에 대한 공격을 지역감정 또는 지역차별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그게 어떻게 인종주의가 될 수 있느냐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사전적인 개념의 인종주의를 기준으로 한다면 호남에 대한 혐오는 인종주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인종주의적 사고방식의 핵심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을 기준으로 그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흑인이나 유대인이 그렇게 선택해서 태어난 게 아닌 것처럼, 호남 사람, 영남 사람, 충청도 사람들도 자신의 출생지를 선택해서 태어난 게 아닙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타고난 조건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타고난 조건을 이유로 사람을 비난하고 모욕하기 시작하면 무슨 수를 써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 사이의 유전적 차이는 같은 인종집단 내부의 유전적 차이에 비해 훨씬 사소하다고 합니다. 결국 인종주의적 관점이란 과학적인 근거보다는 다른 사회적 집단을 증오하기 위한 자신들만의 편협한 논거를 과학과 합리라는 외피로 포장한 것입니다. 1965년 유엔총회에서도 지역차별을 인종주의의 한 갈래로 규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호남혐오증에 인종주의적 편견이 내재돼있다는 것은 온라인에서 호남을 폄하하는 표현에서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호남을 공격할 때 쓰이는 종특 즉, 종족 특성이라는 표현은 호남이 애초부터 대한민국의 다른 지역과는 다르다는 편견을 깔고 있습니다. 호남에 대한 공격을 나름대로 다른 인종에 대한 그것으로 포장하여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세월호 사건에서도 이런 편견과 악의는 노골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슬라이드 3)


-역시 또.. 설마 했더니 전라국이네요.. 아무리 대한민국서 제일 가깝고 가기 쉬운 해외라 해도 전라국으로 여행가는건 아니라고 들었어요(yas0****)

-한국인이 안죽고 절라디언이 죽어 다행이지 않겠노 ㅋㅋㅋㅋㅋㅋㅋ(cafe****)

-선장이 잘못했네. 다른 나라 해역에 들어 갈 땐 반드시 사전에 통보해야 하는데 그냥 들어가니까 쳐들어오는줄 알고 그쪽에서 어뢰 쏜듯(dori****).

-간만에 전라도에서 흐뭇한 소식이네. 염전 조심해라 ? 점심 신나게 홍어탕 먹어야지(schu****)


이 댓글들은 우리나라 최대의 인터넷 포털인 네이버의 세월호 관련 기사에 달린 것들입니다. 아시다시피 호남 지역은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장소일뿐, 그 사건의 당사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호남은 이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 댓글들은 그런 사실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안 좋은 사건이 전라도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월호 이준석 선장이 호남 출신이고 청해진해운의 청해진이 과거 완도의 지명이라는 이유로 그 회사도 호남 회사라는 소문이 인터넷에서 광범위하게 퍼졌습니다. 지금도 막무가내로 이준석은 호남 출신이고 이런 사건이 일어난 호남은 악마의 땅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 댓글의 표현을 주목해보십시오. 전라국, 해외, 한국인이 아닌 절라디언, 다른 나라 해역 등등 어떻게든 호남과 대한민국을 분리해서 별개의 것으로 인식시키려는 악의가 담겨 있습니다. 호남을 향한 저주와 증오가 합리적인 근거나 논리가 아닌, 한번 덧씌우면 어떤 노력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악마적인 인종주의적 프레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2.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프레임

호남 사람들도 어떻게든 저 잔인한 인종주의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사투리를 고치고 표준말을 사용하거나 호적을 옮기는 것들이 어떻게든 저 인종주의의 굴레를 벗어나 보려는 몸부림입니다.

그런데 호남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것도 그냥 버려두지 않습니다. 호남놈들, 어떻게 고향을 숨기고 사투리마저 고치느냐? 정말 무서운 놈들, 사기꾼 본능에 철저한 놈들이라는 비난이 따라옵니다.

호남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를 감추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홍어다, 절라디언이다, 일곱시다, 까보전이다 등의 모욕을 감수해야 합니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정당한 의견을 말해도 그 말을 한 사람이 호남 출신이라는 것이 드러나기면 그 발언의 가치는 땅에 떨어집니다. 까보전-까고 보니 전라도더라-하는 표현이 이러한 폭력성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아무리 좋은 의견, 옳은 말을 해도 그 말을 한 사람이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 가치나 진정성을 인정할 수 없다면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노력이 전혀 무의미해집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사람에게는 어떤 선택이 남게 될까요? 이것은 매우 무서운 결론으로 이어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알던 젊은 목사님 한 분이 여러 사람 모인 곳에서 “호남 사람들은 목회자들도 자기들끼리만 뭉친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자리가 자리인지라 길게 얘기하지는 못했지만 호남에 대한 질시와 혐오가 성직자 신분에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죽어라고 증오하니까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감추고, 죽어라고 왕따를 시키니까 왕따들끼리 뭉쳐서 자기를 보호하고 아픈 상처를 위로하겠다는데 그것마저도 용납할 수 없나 봅니다.

슬픈 것은 이러한 논리가 우리나라의 진보세력과 양심적인 지식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 신안 섬노예 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한민국의 인터넷 세상이 온통 호남을 저주하고 증오하는 의견들로 넘쳐났습니다(슬라이드 4).


-저기 경찰하고 섬주민하고 다 한통속이라 탈출도 못한다더라. 여행가려 했는데 무서워서 가겠냐 ㅎㄷㄷ 빨리 여행금지구역으로 지정해야한다.

-역시.........그곳이랑께. 경찰도 동네주민 노예주인 터미널 직원들 모두 한통속이랑께. 이끼 실사판이랑께

-삼성 이병철:전라도 출신은 뽑지말고 뽑더라도 요직에는 앉히지마라?명언이지

-우리나라도 링컨같은 대통령이 나와서 전라도 노예해방 선언해야될듯

-저 직장 이번에 여수쪽으로 발령받았는데... 정말 많이 위험한가요? ㄷㄷ..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많이 위험한가요??? 여수쪽에는 특히나 섬 많잖습니까


저희 지역차별극복시민행동이 이 문제로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만, 섬노예 사건은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고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철저한 법적 제재를 가하는 것으로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어떤 논리로도 저 사건을 호남과 호남 출신들 전체와 연결시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 댓글들은 섬노예 사건=호남, 호남=섬노예 주범들이라는 논리를 적극적으로 전파하고 있습니다.

진보 진영의 선배와 이 문제로 얘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호남 사람들도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욕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여쭤봤습니다. “섬노예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과 관련이 없는 호남 사람이 어떻게 책임을 집니까? 신안군 섬마다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염전노예 찾아내서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면 다 욕을 먹어야 한다는 겁니까? 도대체 그게 가능한 얘기입니까?” 그 선배님, 이 질문에는 답변을 하지 않으시더군요.

좀더 유명한 사례가 있습니다(슬라이드 5). 지난 2002년 대선 다음날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진보 논객 한 분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습니다. “어떻게 95%가 나오느냐? 민주노동당도 있는데 왜 민주당만 찍느냐? 니들끼리 전라인민공화국이나 만들어라.” 당시 호남의 노무현 후보 지지 몰표에 대한 비아냥과 적대감을 담은 포스팅이었습니다.

웃기는 것은 그 진보 논객이 이명박정권 탄생 이후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뀌었다고 나라가 이렇게 엉망이 되느냐?”며 울분을 토했다는 점입니다. 자신들은 보수세력을 반대하고 보수정권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앞장서서 보수세력의 집권을 반대해온 호남의 정치적 선택에 대해서는 ‘지역주의’라는 딱지를 붙이는 이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결국 진보진영에까지 뿌리내리고 있는 인종주의적 호남혐오증 아니면 설명이 어려운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호남은 무슨 짓을 해도 까보전이고, 알보칠이라는 인종주의적 편견의 진보형 버전이 바로 호남에 대한 지역주의, 토호세력이라는 딱지라고 봅니다. 호남 지역구에서 다선 의원의 배출을 막자는 이런저런 논의도 결국 이런 인종주의적 편견의 연장선에 있다고 봅니다. 호남 니들은 표만 주고, 앞에 나서지는 말라는 거죠. 정치 지도자를 만들지 말고 다른 지역 정치 지도자를 지지하기만 하라는 겁니다.

호남 호적과 사투리를 감추면 고향조차 숨기는 사기꾼이라고 경멸하고, 그래서 호남 사람이라고 드러내고 살면 홍어, 절라디언이라고 욕하고, 왕따를 피해서 모이면 지들끼리만 똘똘 뭉친다고 욕하고, 표는 자신들에게 달라면서도 정작 지지해주면 지역주의라고 비웃습니다.

혐오발언들의 내용이 악랄한 것도 문제지만 더욱 큰 문제는 호남이 어떤 노력을 해도 저 저주와 증오의 프레임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호남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금까지 호남을 욕하는 논리를 그대로 이어가보면 호남 사람들은 모두 이 나라를 떠나거나 심지어 모조리 몰살을 당하지 않으면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 같습니다.

이거 과장이라고 보십니까? 지금도 일베 들어가 보면 홍어, 절라디언 몰살시켜야 한다는 저주의 외침이 수없이 올라오고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원론적으로 이것은 이 나라 공동체를 공중분해시키는 내란의 범죄라고 할 만합니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목소리는 너무 적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나라에는 성 소수자, 다문화 가정 등 소수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인권에 대한 민감성/감수성이 높다는 얘기입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반려동물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호남 사람들이 당하는 모욕과 고통, 끔찍한 소외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곧장 지역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지역차별을 고치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지역주의입니까? 불이야 외치는 자가 방화범이 되고, 강도를 신고하는 사람이 강도로 몰리는 세상입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3. 소수 루저들의 문제다?

호남에 대한 인종주의적 혐오발언이 문제될 때마다 나오는 전형적인 반응이 ‘철이 안 든 몇몇 소수 루저들의 일탈 행동일 뿐, 너무 심각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이런 의견을 믿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저런 진단이 사실이라면 정말 안심하고, 시간이 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안타깝지만 호남 증오 현상이 소수 루저들만의 일탈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혐오 발언이 주로 생산되는 일베의 경우 동시 접속자 수가 2만~3만에 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2012년 말 기준으로 일베 회원이 100만 명을 넘어섰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회원은 13만 명에 이른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비교하자면 정기구독자 100만 명에 어떤 형태로건 글을 기고하는 필자가 10만 명이 넘는 일간지를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 이런 언론매체는 많지 않습니다. 좀 과장하자면 조중동이나 KBS, MBC, SBS에 맞먹는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거대 언론매체가 매일매일, 순간순간 호남에 대한 저주와 증오, 홍어들 다 때려죽이고 몰살시키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거 나라 망할 일 아닙니까?

상당히 정밀한 데이터와 정제된 논리를 갖추지 않으면 저런 지지층, 독자층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일베의 일반 사용자들에게 논리와 이념, 데이터를 제공하는 고급 사용자층 즉 지식인들이 배후에서 상당히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일베가 팩트를 강조하는 것도 나름 근거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충격적인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호남 사람들이 저지른 만행이랄까, 패륜적인 행위만 아주 상세하게 모아놓은 파일을 인터넷으로 받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대단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호남 사람들의 온갖 약점을 어쩌면 그리도 상세하게 모아놓았는지 충격이더군요. 그 파일이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두 가지 측면이었습니다.

첫째, 비록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된 상태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런 특정 주제의 자료를 그렇게 모을 정도라면 일상적으로 그런 자료를 다루는 사람 즉 상당한 학문적 훈련을 받은 지식인일 거라는 점.

둘째, 그 파일을 만든 본인에게 금전적으로나 학문적 업적으로나 직접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님에도 그런 작업에 매달릴 수 있는 그 증오와 집념.

소름끼치지 않습니까? 지식인들은 이 나라 전체의 자원을 이용해 나라의 미래를 모색하는 역할로 훈련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훈련받은 지식과 전문성을 활용해 이 나라 공동체를 뿌리째 흔드는 일을 한다는 게 저는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악의를 집요하게 실천에 옮긴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이해관계와는 좀더 다른 집단 무의식과 집단지성이랄까 그런 것을 확인한 느낌이었습니다.

자신의 고향 아닌 다른 지역을 비하하는 표현들은 항상 있었습니다. 그런 비하가 꼭 호남만을 향한 것도 아닙니다. 영남 보리문둥이, 강원도 감자바위 등. 그런 점에서 이 문제를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그 분들이 결정적으로 놓치시는 게 있습니다. 그런 소프트한 폄하 발언 등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호남 증오 발언과 그 성격이 분명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 점을 놓치면 왜 호남 지역을 향한 혐오 발언이 유난히 폭력적이고 악의적인지, 왜 지속적으로 강화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호남 혐오는 우리나라 기득권층이 정권을 재창출하고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 경제적이고 비용효율적인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방치한다고 해서 결코 사라지거나 약화될 수 없는 사회적 메커니즘입니다.

홍어족, 절라디언, 펭귄/쩔뚝이(김대중 전 대통령을 혐오하는 발언), 까보전, 알보칠 등 호남 혐오발언의 폭탄 세례를 퍼붓기만 하면 대통령 선거나 총선, 지방선거 등에서 땅 짚고 헤엄치기로 손쉽게 승리할 수 있기 때문에 이 현상이 사라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서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고, 그 집단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 호남 혐오 현상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화되고 악질화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일베의 등장과 영향력 강화가 이러한 진단을 뚜렷하게 증명해줍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권위주의 정권들은 군부 엘리트들의 물리력을 기반으로 손쉽게 정권을 창출하고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즉, 범보수 진영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표주자가 흔히 군사정권이라고 불리는 군부 출신 정치 엘리트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87년 체제가 들어선 이후 이들 군부 엘리트들의 물리력을 배경으로 한 집권 연장은 불가능해졌습니다. 선거라는 방식을 통하지 않고는 합법적인 권력을 창출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범 보수 진영의 대표주자를 바꾸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즉, 물리력을 통하지 않고 의제 설정과 데이터 발굴, 논리 구축, 이미지 메이킹 등을 통해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어낼 수 있는 전문가 집단이 정권 창출과 유지의 주도 세력이 되는 겁니다. 조선일보 등 메이저 언론사들이 ‘대통령을 만드는 신문’의 역할을 자임하고 실천에 옮겼던 것이 이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슬라이드 6).

일베는 이러한 노력이 이제 메이저 언론 등을 활용한 제도권의 범위를 벗어나 확산되는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베에 철없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호남 혐오 논리의 수용층이며, 이들에게 논리와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은 보다 전문적인 역량을 갖춘 고급 지식인 계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베에서 호남 혐오 콘텐츠가 유포되고 일종의 대중적 검증을 거친 뒤 네이버나 기타 인터넷 코뮤니티로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베 현상은 증오심에 물들고 기득권 옹호의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지식인들의 왜곡된 논리에 젊은이들이 포섭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시급하게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일부 철없는 루저들의 일탈이기 때문에 그냥 방치해도 된다는 논리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고,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놓치게 만들 것입니다. 이 문제를 그냥 방치하면 호미로 막을 것을 나중에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4. 심각한 후유증 불가피

경제학에서 외부효과(Externality)란 것이 있습니다. 가령 어떤 기업이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오폐수를 근처 하천에 방류하면 악취가 발생하고 인근 주민들의 건강이 나빠집니다. 문제는 주민 치료비나 하천 정화 비용을 해당 기업이 지불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폐수를 발생시키면서 얻은 이윤은 기업의 소유인데 그 피해 비용은 주민들과 지역사회, 국가 전체가 지불합니다. 게다가 기업이 얻는 이윤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총량 비교하면 비용이 더 큰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지역차별과 혐오발언이 이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호남 혐오 발언을 부추겨서 이익을 얻는 집단은 소수의 기득권 세력인 반면 그 피해는 호남만이 아니라 전국민에게 돌아갑니다. 혐오발언 조장을 통해 기득권 집단이 얻는 이익이 10 정도라면 이 민족의 현재와 미래에 끼치는 후유증은 1백, 1천, 1만을 뛰어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입니다.

호남 혐오와 왕따는 일종의 사회적 학살이라고 봐야 합니다(슬라이드 7). 산업화가 본격화되던 1970년 호남(광주 전남 전북)의 인구는 565만2000명으로 전국의 20.4%였지만 40년이 지난 2010년 호남의 인구는 506만 명,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10.2%로 반토막이 났습니다. 줄어든 인구는 먹고살 길을 찾아 수도권이나 영남의 공업지구로 옮겨갔다고 봐야 합니다.

호남 인구가 국내에서 단순히 수평 이동한 것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을까요? 호남 출신에 대한 혐오나 기피, 왕따 등을 고려해보면 이들이 낯선 타향 땅에 잘 적응해서 살았을 거라는 해피엔딩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호남 출향민들이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고 육체적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간접적인 자료가 서울시 저소득층의 출신 지역 분포입니다. KDI가 1981년 서울시 저소득층의 출신지역을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호남 32.6%, 충청 17.9%, 서울 16.4%, 영남 12.6% 등의 비율로 나옵니다. 1990년 현대사회연구소가 서울지역 저소득층 가구주 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도 비슷합니다. 출신지별로 호남(34.7%), 충청(23.4%), 영남(13.4%), 서울(11.3%), 경기(8.9%) 등의 비율입니다.

현대사회에서 경제적 지위의 추락은 생활의 여유와 신체적 건강을 포함한 삶의 전반적인 조건이 취약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호남 출향민들이 타향 땅에 뿌리박고 삶의 터전을 장만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규모의 숫자가 열악한 조건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소득 낙후, 교육 혜택의 소외, 건강의 악화, 3D 분야 종사에 따른 생존 압력 등이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광주항쟁의 경우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수백 명의 사람들이 희생됐지만 호남에 대한 사회적 학살에서는 수십 년에 걸쳐 수만 또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희생됐다고 봅니다. 일부 사람들은 앞으로 호남이 아메리칸 인디언처럼 소수화되어 소멸의 길을 걷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합니다.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피해 외에 정신적인 후유증이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육체의 상처는 비교적 쉽게 아물고 치료되지만 정신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치료하기도 어렵습니다. 호남을 향해 퍼부어지는 온갖 저주와 모욕이 그냥 장난처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혀질까요? 지금 호남 사람들이 반박도 못하고 죽은 듯이 지내니까 앞으로도 그냥저냥 저렇게 살 것 같습니까?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때려도 헤헤 웃으면서 언제까지나 그냥 그렇게 지나갈 것 같습니까?

인간이란 것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모욕감은 절대 그냥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육체의 상처와 달리 정신적인 고통과 모욕감 등 상처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오히려 더 증폭되고 악화되기 쉽습니다. 이것이 임계점을 지나 폭발하게 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게다가 아메리카 인디언과 달리 호남은 쉽게 짓밟을 수 있을 만큼 소수가 아닙니다. 호남 거주민과 호남 출신들 즉, 호남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적게 잡아도 전체 국민의 20~25% 수준입니다. 전국민의 4분의 1 또는 5분의 1이나 되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모욕당하고 저주와 증오, 왕따의 대상이 되는 나라가 과연 제대로 운영되고 유지되고 건강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사실 외부의 어떤 세력이 작심하고 이런 상황을 악용하려고 든다면 이 문제는 우리 내부의 화약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과거 인터넷에서 지역간 악플 경쟁이 벌어질 때 말투나 표현이 이상한 사람들이 끼어드는 사례가 발견된 적도 있었습니다. 일종의 이간질을 하는 사람들이었는데요, 호남 왕따나 저주, 증오, 모욕 현상이 지속될 경우 우리나라가 외부의 악의적 이간책이나 공작에 매우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점은 명백합니다.

무엇보다 호남 차별과 증오, 혐오 현상은 이 나라의 정신적 생태계를 심각하게 훼손하게 될 것으로 우려합니다. 자신의 행위가 아닌,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어떤 집단에 포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모욕과 차별, 공격을 당하게 된다면 그런 사회는 더 이상 정의와 공평, 합리주의와 법치주의의 질서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서로를 도와서 발전으로 나아가는 선순환의 생태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공격해서 다함께 몰락하는 악순환의 생태계가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최근 연세대에서 원주 캠퍼스 학생들을 원세대생이라고 부르고 성골, 진골을 따진다는 기사가 나와서 충격을 주었습니다만 저는 이것이 호남 왕따 현상과 본질적으로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연세대는 몇 년 전 연고전에서도 총학생회 차원에서 호남을 비하하는 플래카드를 거리에 내걸어 문제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봅니다.


5.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이 문제의 피해자이자 당사자인 호남 출신들 그 중에서도 호남 출신 엘리트들이 이 문제의 해결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나서야 한다고 봅니다. 의외로 호남 출신 엘리트들이 이 문제의 해결에 소극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인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뭐가 해결되겠느냐?”는 반응이 많았고 심지어 “이런 일을 하더라도 호남 사람이 앞에 나서면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일종의 자기검열 또는 패배의식이 심각한 상태라고 봅니다. 이것은 사실 이 문제에 대한 호남 정치엘리트들의 오랜 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거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커지는 괴물이니 아예 입 밖에 꺼내지도 말고 모르는 척해라”는 것입니다.

호남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인 입장에서 이런 태도도 이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문제의 해결이 아닌 악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에게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호남에 무슨 특혜를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공화국에서 당연하게 보장되는 최소한의 권리, 인간적인 모욕과 증오, 공격을 피하게 해달라는 요구입니다. 이런 것도 요구할 수 없는 나라라면 그 나라는 민주공화국이 아닐 것이고 그런 대접을 감수하는 사람들은 시민이 아니라 합법적인 노예 신분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호남에 대한 인종주의적 공격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결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칼을 휘두르는 상대에게 똑같이 칼을 들고 대항하자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입을 모아서 “그 칼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자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요구조차도 지나치게 과격하다고, 그런 발언 하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그냥 칼로 난도질하는대로 그냥 죽으라는 얘기밖에 더 됩니까?

그런 소극적인 대응 방식으로 호남 혐오 현상이 조금이라도 개선된다면, 하다못해 그냥 현상유지라도 된다면 그런 대응 방식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한 나라의 동포들을 향해 홍어니 절라디언이니 하는 인종주의적 공격과 함께 “사내놈들은 때려죽이고 계집들은 강간하자”는 추잡한 목소리가 저렇게 공공연하게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10여년 전만 해도 이런 식의 노골적인 공격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슬라이드 8).

이 문제는 인간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으로 대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민주주의 법치국가의 기본 원칙은 개인마다 자신의 행동에 상응하는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식이고 정의의 기초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호남 혐오와 저주, 증오만은 이런 원칙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모욕하고 상처를 주고 왕따를 시켜도 거기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법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법제화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합리적이고 신중한 자세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실제 법제화 처벌 기준은 △친고죄 조항에 대한 재검토 △집단모욕죄의 적용 확대 △장기적으로 고의성을 띤 행동의 제재 등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법률 전문가와 시민단체 여러분들의 폭넓은 의견 수렴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발표를 마치면서 두 가지 점은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호남에 대한 혐오나 증오, 왕따 현상에서 호남의 책임을 무조건 외면하고 호남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일방적 주장, 흑백논리를 펼치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오늘은 자세한 말씀을 드리기 어렵지만, 저는 이 문제의 전향적 해결을 위해 가해자 못지 않게 피해자인 호남도 적극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호남과 영남 나아가 전국의 양심적인 엘리트들의 동참이 없이는 이 문제의 해결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로 이익을 보는 것은 소수일뿐 실은 호남과 영남 나아가 대한민국이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긴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by 구오스 | 2014/07/11 08:41 | 트랙백(1) | 덧글(1)

조선일보 제목, 영호남 차별의 '예술'

지난 7월 31일 조선일보 인터넷에 [익산 모자에게 무슨 일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떴다. 자신의 어머니를 때려죽인 21세 청년이 알고 봤더니 어머니를 살해하기 전에 성폭행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어머니의 시신에서 청년의 정액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사실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 기사에는 무려 185개의 100자평이 달렸다. 조선일보 관리자가 알아서 지운 ‘베스트’를 제외하고 남아있는 100자평 가운데 가장 많은 32개의 찬성을 받은 것은 [유영철이는 어디였더라. 근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군.]이었다.

나머지 100자평도 잠깐 소개해보자.

[또야??? 이번엔 친모를 강간살해한 민주투사야?]

[그 에미에 그 자식이구나 에라이 몹쓸 동네의 몹쓸 인간들아 제발 이러한 중생들이나 구제하는 일에 신경써라 부질없는 좌파놀음에 끼어들지 말고 ...되나 안되나 한나라당과 정부에 반기만 드는 몹쓸 사람들아]

[좌우간 이 지역 종자들은 정상인으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패륜아들만 사는 곳인가?]

[윗물이 더러운데 ..국운이 끝났다는 얘기.. 남탓만 하는 정치.오로지 편갈라서 보는 국민. 민주화 이래 도덕성이 땅에 떨어지고 정채성도 헤매는 요즘 알몸으로 뉴스하고. 원나잇하는 세상 책임감 없는.지난 10여년의 결말..휴전일도 모르고...대중이 이래 이꼴이다...]

[사건이 터진 곳이 어디라고요???]
[전라북도 익산 기억하세요!]
[어디긴 어디여 거시기지 ㅋ]

[자기 딸에게 햇볕을 안주는 인권 노벨상의 DJ 영향을 받아서인지,그 동네엔 이 정도는 뉴스가 아닐 지만... 가파 동물의 왕국도 아니고 참으로 개탄스럽다. 명히 사회적 타살이 아닌가? 일간 국장을 성대히 치뤄서 억울한 원혼을 달랬으면 합니다.]

[치졸하고 엽기적인 범죄는 다 전라도에서 일어나지 왜일까??]

[얼마 전 기사엔,,, 절라도 광주에서 고위 공무원인 시아버지가 며느리 강제 성추행으로 고소고발 당햇다는 기사가 났더만..... 절라도 익산에서....어휴~ 끔찍도 하다........하여간 잡스런 동네는 동네야~~~ 주막집 잡부의 사생아가 교주로 모셔지는 곳이니~~~ 하기야~~~~~~~~~~]


이 기사보다 보름쯤 전인 7월 16일에는 [정읍서 이장이 임신 공무원 폭행]이라는 기사가 조선일보 인터넷에 올라왔다. 기사 내용은 제목 그대로였다. 이 기사에는 10개의 100자평이 올라왔다. 몇 개 소개한다.


[우띠 그짝 동리는 아래위도 없고 남여노소도 없고 예의도 없고 꽁짜던 억수로 밝히고(거시기) 시방 국회에서도 하는 거 보시요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네요]

[참으로 몰상식하고 무지막지한 놈이네. "정읍(호남)"이란 글자에서 나도 모르게 눈길이 머무는 이유는 뭘까?]

[세브란스 병원에서 거친 숨을 쉬면서 이 시간 저승길 차를 기다리며 반성하고 참회하려는 김대중이보다는 그래도 덜 나뿐 사람이고 그 동네 이장님 이시네그려,]

이상 예를 든 2개의 기사 제목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지명’을 제목에 굳이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익산과 정읍은 모두 전북 지방의 지명이다. 전남이나 전북, 광주 등 호남 지방의 지명은 특히 조선일보 독자들의 예민한 후각을 자극하는 ‘냄시(냄새의 전라도 사투리)’라도 갖고 있는 모양이다. 마치 식인상어가 멀리 떨어진 곳의 피 한 방울에도 미친 야성이 발휘되는 모양이 연상된다. 위의 조선일보 100자평은 조선일보 독자들이 스스로 그러한 야수성을 적나라하게 고백한 증거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조선일보는 이런 패륜 사건 기사의 제목에 항상 지명을 포함시키는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사례들을 좀더 살펴보자.

장애여동생 성매매 언니 실형

정신지체를 지닌 여성의 친언니가 동생에게 강제로 성매매를 시켜 돈을 챙겼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위의 사건들과 비슷한 시기인 7월 14일 경남 울산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하지만 제목에는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 기사를 읽어봐야 어디에서 일어난 일인지 알 수 있다. 이 기사에는 18개의 100자평이 달렸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난 울산 지역이나 울산이 위치한 영남 지방이나 영남 사람, 영남의 정치 지도자를 욕하는 내용은 없었다.

아버지 폭행 돈뜯은 철없는 10대 강도

이것은 지난 7월 16일 10대 청소년이 유흥비 마련을 위해 친구들과 함께 아버지를 폭행했고 금품을 뺏었다는 내용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역도 울산이다. 하지만 역시 기사 제목에 ‘지역’은 없다. 이 사건에는 3개의 100자평이 달렸다. 물론 지역을 언급한 100자평은 없었다.

이 정도 사건은 워낙 죄질이 양호(?)하고 경미해서 굳이 지역을 포함할 이유가 없었던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궁금증을 풀려면 아무래도 기사를 더 살펴봐야 할 것 같다.

40대男, 의붓딸 2명 살해 후 자살기도

지난 40대 남성이 의붓딸 2명을 살해한 후 자신도 자살을 기도했다는 내용의 7월 13일자 기사이다. 이 사건은 경남 밀양에서 일어났다. 역시 기사 제목에 ‘지역’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 기사의 경우 조선일보가 영남 지방에서 발생한 흉악 범죄 기사의 제목에서 의도적으로 지명을 뺐다고 비난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조선일보는 아예 이 사건을 보도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조선일보 홈페이지나 기타 포털의 기사에서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

저 기사를 뺀 대신 조선일보는 하루 뒤인 7월 14일자로 다른 사건을 보도했다.

광주 연쇄살인피의자 현장검증 `태연자약'

하루 전 흉악범죄의 보도를 거른 것이 미안해서일까, 이번에는 흉악범이 현장검증을 태연하게 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그런데 이 기사의 제목에는 ‘광주’라는 지명이 친절하게 들어가 있다. 어떤 사건은 아예 보도조차 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건은 굳이 지명을 친절하게 제목에서부터 ‘홍보’해준다. 무슨 차이일까? 사건 자체의 경중에 차이가 있는 걸까?

위의 의붓딸 살해 40대 남자 관련 기사는 사건 자체가 처음 알려지는 내용이다. 반면 광주 현장검증 기사는 이미 사건 자체는 알려진 상태에서 현장검증을 했다는 내용이다. 일반적인 보도 관행이라면 당연히 전자를 더 크게 다루는 것이 맞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전자는 아예 보도조차 하지 않고, 후자는 제목에 지명을 친절하게 포함시켜 보도한다.

현장검증 관련 기사가 보여주는 팩트는 딱 하나다. 연쇄살인을 저지른 놈이 현장검증을 ‘태연자약’하게 하더라는 얘기다. 한마디로 흉악 범죄를 저지른 놈이 태도조차 끔찍하다는 얘기이다. 그러한 내용은 기사 제목 제일 앞부분에 자리잡은 ‘광주’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조선일보는 왜 이리도 ‘호남’과 ‘흉악범죄’를 연결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다른 기사를 하나 더 보자.

해외출장 친구 아내 성폭행

50대 남성이 해외 장기 출장을 떠난 고향 친구의 부인을 성폭행했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부산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 기사 역시 제목에 ‘지명’이 없다. 하지만 조선일보를 나무라지는 말자. 조선일보는 이 사건 역시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홈페이지에도 포털에도 이 기사를 보도한 흔적이 없다. 쿠키뉴스, 노컷뉴스 등이 외롭게 이 사건을 ‘제목에서 지명을 뺀 상태’로 보도했을 뿐이다.

조선일보가 영남 지방에서 벌어진 흉악 사건의 보도기사 제목에서 항상 지명을 빼는 것은 아니다. 지명을 넣는 경우도 있다. 아래가 그 경우에 해당한다.

대구경찰, 주택침입 성폭행 40대 회사원 영장

40대 회사원이 새벽에 여성 혼자 있는 집에 침입, 성폭행하고 금품을 훔쳤다는 내용이다. 이건 대구에서 벌어진 사건이고, 조선일보도 제목에 ‘대구경찰’을 넣었다. 그런데, 저 제목은 실은 연합뉴스의 제목이다. 조선일보는 연합뉴스가 뽑은 제목을 그냥 사용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저 기사가 처음 조선일보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떴을 때의 제목은 저것과 달랐다. 어떤 제목이었을까?

처자 있는 평범한 회사원, 독신녀 집 침입 성폭행

기가 막히게도 ‘지명’은 빠졌다. 나는 이 제목을 적어놓으면서도 화면 캡처하는 것을 빠트렸다. 하지만 분명 저 제목이었다는 것은 내 모든 것을 걸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조선일보가 시비를 걸어온다면 얼마든지 법적 책임을 질 자신이 있다.

너무 흉악 사건만 다룬 것 같다. 이른바 ‘미담’ 기사들은 어떨까? 원래 신문 사회면 기사라는 게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이 압도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도 그 ‘가뭄에 콩 나듯 하는’ 미담 기사의 제목에서도 ‘호남 지명 올리기’라는 원칙이 일관되게 적용된다면 우리는 조선일보의 선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시민 휴식처를 위해"…80억대 토지 기부

부산에서 최근 숨진 할머니가 80억대 서울 땅을 강서구에 기증했다는 미담 기사이다. 그런데 분명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인데도 제목에 부산이라는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일보, 괜히 조선일보가 아니다. 이 기사 역시 조선일보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떴던 제목은 달랐다. 이것 역시 적어놨다(역시 캡처는 안했다).

숨진 부산 토박이 할머니, 80억대 서울땅 기부

그럼 그렇지. 뭐, 그래도 좋은 일인데, 미담인데, 그런 일을 한 분의 거주 지역을 표기하는 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이런 원칙이 일관되게 다른 지역 특히 호남에도 적용되면 된다. 그런 점에서 다른 기사도 한번 살펴보자.

KAIST에 300억원 기부한 김병호 회장

17세에 전북 부안서 76원 들고 상경한 김병호 씨가 평생 모은 돈 300억원을 KAIST에 기부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기사 제목에는 전북도, 부안도 없다.

조선일보 편집자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이른바 역지사지를 해볼 필요도 있다.

위의 부산 토박이 할머니 기사에서는 사실 ‘부산에서 평생 살아온 분’이 자신의 고향이 아닌 서울에 사놓았던 땅을 서울에 기증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그래서 제목에 ‘부산 토박이’와 ‘서울 땅’을 강조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을 것이라고 이해해본다. 하지만, 다음 기사는 어떤가?

사고車 돕다 숨진 女 2명 의사자 지정 추진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난 차량을 위해 차를 멈추고 도로에 내려 사고 수습을 돕다가 본인들조차 사고를 당해 숨진 젊은 여성 두 사람을 의사자(義死者)로 지정하려고 추진한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의 주어는 ‘김제시’이다. 그런데 제목에서는 주어가 빠져 있다.

신문 편집과 제목 뽑기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업무이기 때문에 문외한이 외부에서 보는 현상만 놓고, 왈가왈부 시비를 걸기는 어려운 점도 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가 저런 제목을 뽑은 데에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근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호남에서 벌어진 흉악범죄 기사의 제목에는 굳이 지명을 넣고, 영남에서 벌어진 비슷한 사건의 기사 제목에서는 어떻게든 지명을 빼는 조선일보의 다른 행태와 연결해보면 조선일보의 저런 제목 뽑기를 선의로만 해석하기는 어렵다.

우연이 되풀이되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봐야 한다. 왜 조선일보 기사 제목에서 호남은 ‘악의 화신’으로, 영남은 ‘미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우연’이 이리도 잦은 것일까?

조선일보의 저런 편집이 의도적인 것이라면 이것은 엄청난 범죄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의 대표신문이라고 자부하는 매체가 자신들의 정파적 이익을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특정 지역에 대한 범국가적인 혐오감을 부추긴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범죄 행위가 성공해서 얻는 이익이 얼마나 될까? 몇백억? 몇천억? 몇 조? 몇십조? 또는 돈으로 따지기 어려운, 대통령을 자신들의 손으로 만드는 그 영향력?

어떤 이익을 얻는다 해도 조선일보의 범죄 행위가 끼치는 그 민족적 해악의 크기와 비교할 수는 없다. 하룻밤 계집질에 쓸 요량으로 집문서와 문전옥답을 모조리 사창가에 갖다 바치는 패륜아 난봉꾼의 행위도 이보다는 덜 추잡할 것이다.

by 구오스 | 2009/08/13 02:02 | 트랙백(4) | 핑백(1) | 덧글(71)

친노신당? 헛된 기대는 버리세요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관리할 수도 없다.'
 
경영의 기본 명제이다. 수치화/계량화하기 어려운 인간 활동의 다양한 정성적(定性的) 측면을 경영학이 끊임없이 정량화(定量化)하려고 시도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친노신당 움직임이 관심을 끌고 있다. 여러가지 명분과 근거를 댈 수 있겠지만 결국 친노신당이 의지하는 가장 결정적인 정치적 자산은 '노무현'이다. 이런 점에서 친노신당의 결정적인(실은 유일한) 정치적 자산인 '노무현'에 대해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 노무현에게서 이어받을 정치적 자산은 없다. 있지도 않은 정치적 자산을 담보로 정치적 영향력이라는 ‘현찰’을 확보하려는 친노신당의 시도는 비참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의 정치적 유산으로 무엇을 들 수 있을까? 지역구도 해소 노력, 남북 정상회담 등 남북 대화, 권위주의적 정치/행정 문화의 해소, 대외무역 등 일정한 경제적 성과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들 유산이 친노신당의 정치적 자산으로서 어느 정도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자.


노무현의 경제 정책은 대규모 무역흑자에서 볼 수 있듯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여러 가지 경제 현안에 대해서 적어도 현재의 이명박보다 잘 대처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경제 살리기'라는 이슈가 노무현의 경제 성적에 대한 불만에서 나온 것도 사실이다. 양극화와 중산층의 붕괴, 서민층의 몰락이라는 경제 현안에 대해 노무현은 어떤 대안도 내놓지 못했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느니 "(아파트처럼) 100배 남는 장사도 있다"느니 하는 말로 정책 성과를 스스로 깎아먹는 언행을 거듭한 것은 더욱 치명적이었다.
 
다른 재화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유산도 통용되고 활용될 수 있는 형태와 표준을 갖춰야 한다. 노무현의 경제적 성과는 이런 형태를 갖춘다는 점에서 우선 실패했다. 이것은 다른 누구보다 노무현 자신의 책임이다. 경제적 성과 자체로서 인정받겠다는 소신에 기반한 행동이었겠지만 대통령은 경제적 성과조차도 정치적으로 평가받는 정치인이지, 실적만으로 평가받는 경제 관료나 기업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한 결과였다.


비록 재임 기간 중에는 욕을 먹었지만 노무현의 경제적 성과가 먼 훗날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거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버리는 것이 좋다. 노무현의 경제 성과는 철저히 현재의 관점에서, 현재 이슈에 대응하고 관리하는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비전 2030'을 노무현의 미래정책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결과물(Output)'만 있고, 그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어떠한 자원과 실행 계획을 '투입(Input)'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대안이 없는, 일종의 희망사항 리스트에 더 가깝다. 노무현이 10년 20년 뒤를 내다보고 미래정책을 고민한 흔적은 있지만 실제 결과물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


최소한 노무현의 경제정책이 이명박이나 한나라당의 경제정책과는 구별될 수 있지 않을까? 이것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간단하게 말해 노무현 스스로 2007년이던가, 연초에 전국민이 보는 TV방송에서 역설한 바 있다. “도대체 정당에 따라 경제정책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습니까? 그건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이거 자신과 자신의 정권의 경제 정책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다. '본질적으로 한나라당과 차이점이 없다'는 선언이다(사실 그러한 동질성 선언은 정치 분야에서 먼저 이루어진 바 있다). 물론 이것이 비난할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이명박의 경제정책과 노무현의 그것이, 실행능력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큰 차이가 없다는 것만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권위주의적 정치문화의 해소를 노무현의 업적, 정치적 유산으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아직까지도 노무현에 대해 식지 않는 애정을 과시하고 있는 노빠들의 충성심의 중심에는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다. 하지만 노무현의 가장 결정적인 정치적 실패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는 점도 이해해야 한다.


노무현을 죽인 결정적인 무기가 바로 검찰이란 사실을 부인할 사람이 있을까? 노무현은 현직 대통령으로서 검사와의 대화라는 이벤트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권위주의적 정치문화를 해소하려는 노력을 보여줬다. 이러한 노력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나라의 각 부분에까지 두루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노무현이 정권을 놓는 순간, 그러한 노력의 결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노무현의 죽음은 그가 기울인 권위주의 정치문화 타파의 노력이 얼마나 허무한 것이었는지 보여주는 반면교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노무현을 욕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 그의 노력이 순수한 것이었다는 점은 대부분 인정할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실책에 대해 직접 죽음으로 책임을 진 사람에게 더 이상 논리적인 추궁을 한다는 것도 허무한 일이다. 노무현의 허무에 비판의 허무를 더해봐야 허무 아닌 다른 것이 나오기는 어렵다.


그래도 분명한 건, 노무현의 권위주의적 정치문화 해소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점이다. 극렬 노빠들이 “노짱의 위대함은 먼훗날 드러날 것이며, 세속의 타락한 정치권력의 기준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노무현의 실패를 극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노빠들의 주장은 노무현의 업적이 현실 정치인이 아닌, 이념가 또는 철학자(보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공상가')의 그것에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남북대화 노력도 가치가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노무현 개인의 입장에서 가장 숨기고 싶은 부분일 수도 있다. 노무현 스스로 ‘한나라당에 주는 선물’이라고 표현한 대북송금 특검은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무관하게 개혁세력 스스로 남북대화의 합법적 근거를 부인하는 모양새로 남았다. 수구세력이 이후 남북대화의 내용을 계속 왜곡하며 공세를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노무현이 대북송금 특검을 통해 빌미를 안겨준 것이 계기가 됐다.


대북송금 특검으로 남북대화가 상당 기간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면서 남북 당국 사이에 불신의 씨앗이 뿌려진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은 남북정상회담의 연기와 함께 북미 간의 긴장 고조, 북한의 벼랑 끝 전술 등으로 불가피하게 이어지는 악순환 구조를 만드는 단초 역할을 했다.


줄다리기 끝에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다고 해서 해피엔딩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과정을 통해 남북관계는 파행의 위기로 치달았고 김대중 정권의 성과에 더해 한반도 긴장완화와 남북 대화를 반석에 올려놓을 수 있는 결정적인 타이밍을 놓친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남북관계에서 저지른 치명적인 착오가 없다 해도, 사실 남북 대화는 엄격하게 말해 김대중에게 그 지적재산권이 있는 정책이다. 노무현으로서는 이 부분에서 아무리 뛰어난 성과를 올린다 해도 결국은 김대중의 흉내내기에 그치기 쉽다. 노무현이 집권 초기에 남북관계 개선에 상당히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지역구도 해소는 노무현을 상징하는 키워드이지만, 결과적으로 말해 노무현이 가장 처절하게 실패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논의가 이뤄졌기 때문에 상세한 언급은 피한다. 다만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것은, 노무현은 호남차별 범죄 행위를 극복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그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노무현은 그 모든 기회를 날려버렸고 결과적으로 지역차별 범죄를 더욱 악화시켰다. 나아가 스스로 그러한 범죄 행위를 정당화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결국 친노신당 추진파들이 의존하는 노무현의 정치적 자산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무현이 남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자산이 아니라 '부채'이다. 부채도 자산이라며 우긴다면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런 경우 노무현의 뒤를 이어받을 정치세력들은 노무현의 온갖 정치적 실패와 파행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고 속죄하는 노력부터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친노신당 추진’이 그런 노력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부분 동의할 것으로 본다.


정치적 부채 외에도 노무현이 남긴 것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다. 차라리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것에 가깝다.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의 해소를 위해 노무현이 희생하고 참은 것, 노력한 것이 이러한 성격의 유산에 포함된다.


이것은 ‘측정’할 수 있는 유형의 자산은 아니지만, 민중의 기억 속에서 면면히 흐르다가 어느 순간에 정치적 동력으로 이어지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측정할 수 없기에 누군가 이어받거나 계승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실패한 영웅에 대해 민중들이 애도하는 그 집단 무의식 속에 살아있는 자산이기 때문이다. 아기장수 설화가 이러한 정서/문화적 자산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친노신당이 의지하는 정치적 자산, 노무현의 유산은 이렇게 실체가 없다. 하지만 이들이 무작정 허황된 꿈만을 꾸는 것은 아니다. 이들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정치적 자산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들도 알고 있다. 결국 구체적인 실체,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바로 ‘유시민’이다.


이들은 노무현의 ‘전설’과 유시민의 상징성을 결합하여 새로운 정치적 자산으로 만들고자 한다. 간판은 ‘노무현’이지만, 파는 정치 상품은 ‘유시민’인 셈이다. 그래서 사실상 친노신당은 노무현당이 아니라 유시민당이다. 하지만 과연 유시민이 이들의 간절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이들의 기대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유시민의 ‘한계’ 때문이다. 유시민에 대해서 숱하게 지적되고 거론된 역량과 자질의 한계를 여기서 다시 거론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좀더 본질적인 문제를 짚고 싶다. 과연, 유시민은 정치를 재개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그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유시민 스스로가 별로 정치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물론 마지못해, 노빠들의 등쌀에 못 이겨 정치판에 끌려나올 수는 있다. 그럴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적어도 유시민의 솔직한 심정은 결국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것에 가깝다고 본다.


표현이 너무 적나라해서 미안하지만, 유시민이 정치에 나오기 싫은 것은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쫀’ 것이다. 유시민은 노무현이라는 걸출한 정치인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봤고, 그가 얼마나 탁월한 인물인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탁월한 정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싸우려 했던 상대에게 얼마나 비참하게 패배했는지를 낱낱이 지켜봤다. 그것은 유시민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뼈저린 체험일 수밖에 없다. 유시민은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정치적 능력이 노무현의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에도 못 미친다는 것을. 그런 능력으로 노무현도 끝내 이기지 못한 상대와 붙는다고 생각해보라.


유시민은 앞으로 지식소매상에 머무르고 싶을 것이다. 유시민을 아낀다면 그 길을 가도록 놔둬야 한다. 그 일만 한다면 유시민은 나름대로 행복하고 보람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정치에 나선다면 본인에게나, 그를 지지하는 세력에게나 모두 비참한 결과만 낳을 뿐이다. 이건 권투와 비슷하다. 파이터는 한번 비참하게 진 상대에게 다시 대들어 제대로 싸우기 어렵다. 이건 ‘용기’와는 다른 차원의 얘기이다.


친노신당 시도는 거기 모인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의 친노 집단 나아가 우리나라 386 세력의 정치적 운명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심하게 말해, 친노신당 시도는 친노(이른바 노빠들)를 중심으로 한 386들이 앞으로도 의미있는 정치 세력으로 살아남느냐, 역사적인 유물로 형해화되느냐를 가름하는 시금석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정치적 자산인 '노무현'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 작업이 더욱 필요하다. 냉정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해찬이 친노신당 참여에 대해 냉정하게 선을 긋는 것을 봐라. 이해찬은 친노 그룹 가운데서는 가장 정치적인 경험과 경륜이 풍부한 인물이라고 봐야 한다.


친노들, 정신 차려라. 착각 마라.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을 과대평가하고 간이 부은 것 같다. 부잣집 망해도 삼년은 간다고, 노무현과 친노 정치세력이 몰락해도 그럭저럭 민주당과 협상 잘하면 괜찮은 몸값으로 여기저기 자리 찾아갈 수 있다. 그게 친노들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소프트랜딩이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노무현 자살이라는 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이 사건은 노무현에 대한 추모 분위기라는 ‘어음’을 친노들에게 안겨주었다.


하지만 이 어음을 현찰이라고 착각하면 망하는 거다. 삼년 동안 근근히 버틸 재산으로 하루아침에 빚잔치하는 꼴이 된다는 얘기다. 그 빚잔치가 바로 ‘친노신당’이다.


솔직히 말해 그냥 놔두고 친노 무리들이 쫄딱 망하는 꼴을 보고 싶기도 하지만 덩달아 민주당이나 전통 진보 개혁진영이 피해 보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얘기를 한다. 생전의 공과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고인에 대해서 누가 되는 얘기도 피하고 싶다. 그래서 사십구재까지는 기다렸다. 하지만 친노들이 주제 모르고 계속 까부는 것은 참 봐주기 뭐하다. 친노들과는 완전히 갈라서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 나라 진보 진영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진다.

 

by 구오스 | 2009/08/06 21:38 | 트랙백 | 덧글(31)

이명박의 사기 본능 (3)

부지런함과 적절한 연출력을 결합하여 이명박은 샐러리맨의 신화가 될 수 있었다. 대중들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비춰진 허상에 열광할 뿐, 그 후일담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법이다. 물론 이명박과 직접 같이 일하거나, 그의 직접 고객이 되었던 사람들은 그의 실체를 늦게나마 깨닫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렇게 이명박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는 사람들은 매스미디어로 간접적인 이미지만을 받아들이는 대중에 비해서 항상 소수일 수밖에 없다. 추악한 실체의 파악에는 오랜 시간과 고통스러운 과정이 필요하지만, 잘 포장된 허상은 훨씬 받아들이기 쉽다. 짧은 순간에, 달콤한 대리 만족을 통해 가짜 이미지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정보 전달의 경제성과 효율성이란 점에서 비교가 안 된다. 그러니 진실과 허위의 대립에서 항상 허위가 승리하는 구도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이명박의 필승 출세 방정식이었다.

이명박의 출세 방정식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얼마 전 문제가 된 황석영의 사례에서도 다시 한번 입증됐다.

김대중은 노무현의 사망 이전까지도 "지난 대선 선거운동 당시 이명박이 찾아왔을 때 몇 번이나 햇볕정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감을 표시했다"며 "지금 이명박 대통령의 주위를 수구 색깔의 인사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대통령이 소신껏 대북정책을 펼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의미의 발언을 몇 차례에 걸쳐 한 바 있다.


김대중의 이러한 발언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노회한 노정객으로서 이명박이나 현 집권세력에 대한 일종의 회유전략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한 손으로는 볼을 쓰다듬고 다른 손으로는 뒷통수를 치는, 고도의 압박용 발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이명박의 발언을 실제로 믿었다기보다, 저런 식의 '믿어주기'를 통해 오히려 대북정책의 변화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이명박 정권의 정책 변화를 유도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까지 감안한다 해도, 김대중이 적어도 어느 시점까지는, 최소한 지난 대선 당시 이명박이 김대중을 찾아와 공손하게 한 말씀 경청하는 식의 제스처를 취했을 때만 해도 어느 정도 이명박의 판단력이나 정책 마인드를 믿었던 것 같다. 김대중의 성향으로 봤을 때 이명박의 대북정책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드러날 것으로 명백히 판단했을 경우 지금보다 훨씬 빨리, 훨씬 더 분명하게 반대와 경고의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날렸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내 짐작에 이명박은 김대중을 만났을 때 정말 입 안의 혀처럼 달콤하게 햇볕정책에 대한 공감과 지지를 표명했을 것으로 본다. 안 그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한 표라도 아쉬운 판에 여전히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 정치인 김대중과 일부러 척을 질 필요는 없다. 이명박에게 소신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명박 같은 인간에게 '소신'은 삶의 기준이나 원칙 또는 목표라기보다는 잘먹고, 잘살고, 출세하는 데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일 따름이다. 물론 이명박도 가끔 소신이란 게 필요해진다. 어떤 경우일까? 그건 김대중이나 노무현 같은, 일정한 소신(그게 얼마나 정확하고 의미있는 것인가는 둘째 문제이다)을 갖고 있는 인간을 만나 뭔가 얻어내야 할 경우이다. 이럴 때에는 없는 소신이나마 있는 척 꾸며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이명박의 사기 본능이 발휘된다.

이명박은 소신 따위는 가져본 적이 없다. 스스로 '실용주의자'라고 포장하는 게 실은 '소신이 무슨 말인지도 모른다'는 고백이다. 이명박의 '실용'은 "이해관계에 따라 내 맘대로 언제든지 원칙과 태도를 바꿀 수 있다"는 선언일 뿐이다. 그러니 김대중의 햇볕정책에 그 정도 공감을 표시하는 것이야 요즘 애들 말로 '껌'이다.


지난 대선 당시 이명박과 김대중의 만남에서도 이런 사실은 잘 드러난다. 이명박이 김대중을 면담하고 나와서 두 사람의 발언을 소개하는 언론 보도에는 [이명박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햇볕정책도 보다 합리적으로, 북한의 태도 변화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고 소개됐던 것이다. 이 보도대로라면 이명박은 김대중의 면전에서 김대중의 상징과도 같은 햇볕정책을 전면 부인하고, 그 정책을 완전 폐기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당시 언론보도에 소개된, 이명박이 김대중을 만나 했다는 발언은 상식적으로 판단해 극히 현실성이 떨어진다. 대통령 선거전에 나선 제1야당의 후보가 전직 대통령을 만나 인사를 드리는 자리에서 그 전직 대통령을 상징하는 정책에 대해 정면으로 부정하는 발언을 한다? 상상하기 어려운 얘기다. 그 전직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현하고자 할 때는 아예 방문 자체를 하지 않는 정도가 실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일 것이다.


결국 이명박은 김대중 앞에서는 햇볕정책을 적극 지지한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김대중을 만난 뒤 기자들 앞에서는 "햇볕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표명했다"는 식으로 사기를 쳤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대중과 언론들 모두 이명박의 사기질에 넘어간 셈이다. 물론 김대중이나 언론 모두 어느 정도는 '알면서도' 넘어가준 측면도 있다고 본다. 설혹 그랬다 해도, 이명박 역시 김대중이나 언론의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 역시 분명하다.


황석영도 마찬가지다. 이명박은 황석영을 만난 자리에서 황석영의 과거 행적과 현재의 문학적 위상 전부에 대해서 극진한 존경심을 표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국의 대통령 그것도 보수세력의 지지로 당선된 대통령,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통령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 대통령을 자신의 영향력으로 '개과천선'시킬 가능성이 보였을 때 황석영 '작가 선생'께서 느꼈을 흥분과 기대감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황석영이 2+1이니, 평화열차니 하는 할리우드 공상과학 블록버스터 냄새가 풀풀 풍기는 아이디어를 자랑스럽게 펼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내 짐작이 맞는 것 같다. 순진한 황석영 선생... 작가들은 원래 순진하다. 시대를 초월하는 위대한 작가도 얼치기 사기꾼에게 당하기 딱 좋은 심성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작가들의 특성 가운데 하나인 낭만적 환상은 사기꾼 등 기생충류들에게 최적의 서식처가 되곤 하기 때문이다.


이명박은 아마 김정일을 만나도 김일성 수령의 위대하신 영도력과 과거 사회주의 조국의 위대한 성취에 대한 공감,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 북반부 조국의 인민들이 역경을 뚫고 나온 그 창발성과 인내심 그리고 그렇게 탁월한 조국 인민들의 내재적 가능성을 실제로 현실화시킨 김정일 지도자 동지의 위대한 리더십에 감복 감읍 감탄하는 헌사를 입밖으로 내비침에 있어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을 것이라는 데 감히 100원을 건다.


하지만 그때 뿐이다.


그 자리를 뜨면 이명박은 잽싸게 입을 씻는다. 기자들 불러 '준엄하게' 북한의 난동을 꾸짖고, 김정일이 앞으로 개과천선하여 선진조국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자신의 영도를 받도록 교시하였노라고 냄새를 풍겨댈 것이다.


치고 빠지기, 싸구려 물건 비싸게 팔아먹고 잽싸게 도망치기, 다른 데 가서 더 크게 사기치다가 과거 피해자들이 몰려와 항의하면 지금 자신들에게 속고 있는 사람들을 부추겨 과거의 피해자들을 다구리 놓기... 이것이 이명박의 필승 출세전략이다. 세상은 넓고, 사기 칠 일은 많다. 뿐이랴?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언제든 사기에 넘어가기를 원하고, 사기 당하기를 학수고대한다. 바로 이것이 이명박이 항상 사기를 치고 폭로가 되면서도 항상 해피한 이유이다.

by 구오스 | 2009/07/14 13:23 | 트랙백 | 덧글(1)

신 삼당합당 노리는 이명박

김동길이 자신의 블로그에 '가장 두려운 개인, 김대중'이란 글을 올려 호남=백제, 김대중=백제의 한을 상징하는 정치인으로 몰아간 것이 지난 5일의 일이다. 김동길은 이 글에서 북한=고구려며, 핵폭탄을 만들어 불장난을 하고 있다고 묘사했다.

이틀 후인 7일, 이명박은 폴란드 방문 길에  유럽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지난 10년간 막대한 돈을 지원했지만 그 돈이 핵무장에 이용됐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 시절의 '햇볕정책'을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터져나온 이명박과 김동길의 발언은 두 가지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 첫째, 호남에 대한 공격 둘째, 호남과 북한의 동일시이다.
 
호남에 대한 공격에서부터 얘기해보자. 김동길은 무려 1400여 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 한반도를 신삼국시대로 재편하려고 시도한다. 그에 의하면 호남은 백제이며, 김대중은 그 한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들 때문에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틀이 위협받고 있다. 이 글에서 김동길은 북한=핵폭탄이라는 복선도 깔아놓는다.
 
김동길이 띄운 공을 이명박이 스파이크한다. 김대중, 노무현이 추진한 햇볕정책이 결국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도와줬다는 주장이다. 결국 김동길-이명박 콤비는 백제=호남=김대중/노무현=북한=핵무기라는 방정식을 제시한다. 당근, 신라=경상도는 이러한 악의 무리에 맞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사수하는 정의의 사도가 된다. 

이명박의 발언은 해외에서 한 것이지만 그 발언이 의식하는 대상은 명백히 국내 정치 세력들이다. 가령 북한과 전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해도, 이명박의 이번 발언은 전혀 불필요하다. 전쟁을 앞두고 내부의 정치적 반대파를 저렇게 자극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북한의 반발 따위는 애초에 관심 밖이었고... 

김동길-이명박의 이번 발언은 이회창의 선진당에 노골적으로 던지는 추파와 세트를 이룬다. 실은 이회창이나 선진당이라기보다는 충청권에 던지는 러브콜이라고 해야 한다. 국무총리 자리는 그 러브콜에 따라오는 떡밥이고. 

이렇게 정리하면 이명박이 말했던 이른바 중도통합의 내용이 분명해진다. 신 삼당합당이 그것이다. 사실은 3차 삼당합당이라고 봐야 한다. 1차는 김영삼, 2차는 노무현이 추진했다. 1차는 성공했고, 2차는 좌절했다. 하지만 1차부터 3차까지 삼당합당은 결코 변하지 않는 컨텐츠를 공유한다. 그것은 바로 호남의 고립, 호남 포위라는 구도이다. 

김대중이 최근 본격적으로 이명박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도 이들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실제로 김대중의 발언에 대해 상당히 심각한 위협감을 느꼈다는 것을 최근 조중동의 논조나 김동길 등 우파 꼴통들의 언행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10월 재보선이나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들은 정국의 주도권을 되찾아와야 한다는 절실한 요구를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영남 패권주의 세력이 끊임없이 삼당합당, 호남고립을 시도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영남 패권주의의 집권을 보장해주는 가장 유력한, 실은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1차는 성공했고, 2차는 실패했다고 했지만 사실 결과적으로는 2차도 성공했다고 봐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명박의 집권이라는 결과가 그 점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성공했던 시도... 그러니 이들이 끊임없이 이 구도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도 삼당합당, 호남 고립화는 성공할 가능성이 꽤 높다. 하지만 여러가지 난점도 있다. 실상 호남 고립화는 곧, 충청권의 견인일 수밖에 없는데 이게 과거처럼 만만한 작업은 아니라는 게 문제다.

1차 삼당합당은 김종필이라는 충청권 맹주를 설득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간단하게, 별 비용 부담 없이 성사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충청권에 이렇다 할 맹주가 없다. 이회창이 그 역할을 하려고 하지만, 과거 김종필의 영향력과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작업도 훨씬 복잡해지고, 비용 부담도 커진다.

이명박이 충청권을 끌어들이려고 할 경우 행정수도 이전이 예민한 의제가 된다. 이명박의 욕심으로야 심대평 정도에게 국무총리 자리 하나 떼주는 것으로 거래를 끝내고 싶겠지만, 이건 이회창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카드이다.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걸린 사안이기 때문이다. 내 짐작으론, 이명박이 결국 행정수도 문제를 양보할 것 같다. 다른 카드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럴 경우 이명박이 감당해야 하는 정치적 비용도 무척 크다. 김문수가 올해 들어 입만 열면 수도권 규제 문제를 놓고 이명박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실은 행정수도 문제가 충청권과의 정치적 거래의 카드로 쓰일 가능성을 읽었기 때문이고, 그것이 자신의 정치적 위상에 위협으로 작용하리라는 것을 내다보기 때문이다. 결국, 행정수도 문제를 양보할 경우 이명박은 수도권의 반발이라는 비용 지출을 감수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신 삼당합당, 호남 고립화가 성공하기 어려운 요인이 또 있다. 김영삼이 삼당합당을 쌈빡하게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호남의 정치적 위상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점에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과연 1990년 당시처럼 그렇게 일방적으로, 호남이 고립 당하게 될까?

1980년 당시에는 광주에서 어마어마한 학살이 벌어져도 최소한 제도권에서는 찻잔 속 태풍으로 간단하게 정리하고 지나갈 수 있었다. 1990년의 삼당합당도 노무현과 몇몇 꼬마 민주당의 반발이 있기는 했지만 쌈빡하게 처리했다. 하지만 2005년 대연정 제안은 좌절했다. 표면적으로는 한나라당의 거부 때문이었지만 실제로는 열린우리당 집권 세력의 반발이 더 큰 장애물이었다고 본다.

그 제안은 민주개혁 진영을 분열시켰고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에게 정권 탈환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 제안을 한 노무현은 치명적인 내상을 입었고, 그 내상은 결코 치유되지 못했다. 그만큼 삼당합당, 호남 고립화에 대해 반대하고 거부감을 갖는 세력이 늘어났다는 점을 읽을 수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어설픈 삼당합당, 호남 고립화 시도는 심각한 저항을 불러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2차 삼당합당 시도의 실패는 노무현이 고스란히 뒤집어 썼지만, 이번 시도가 실패할 경우 누가 피해자가 될까? 이회창? 물론 이회창도 피해자가 된다. 하지만 대중이 이런 정치적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을 대상은 그만한 중량감이 있어야 한다. 노무현 식으로 표현하자면 '깜'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회창이 그만한 깜이 되나? 이번 삼당합당에 분노하는 대중이 기껏 이회창을 몰락시키는 것으로 만족할까?

그게 아니라는 답변을 바로 조선일보가 내놓고 있다. 조선일보 주필인 강천석이 10일자 지면에 발표한 '이명박·이회창 연대설과 민주당의 고립'이라는 칼럼이 그것이다. 이명박의 발언 이후 사흘만에 내놓은 글이다. 이것들, 참 줄줄이 사탕으로 손발이 짝짝 맞는다.

이 칼럼은 이명박-이회창의 연대설에 언급하면서 민주당이 고립될 것을 우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일보가 민주당의 고립을 걱정한다? 이번 칼럼은 그래서 너무나 얄팍하게 조선일보의 속셈을 보여준다(조선일보 인력들의 능력과 열정이 과거 선우휘나 김대중 시절에 비해 엄청나게 저하됐다는 산 증거다).

조선일보는 이명박-이회창의 연대설을 무기로 민주당에게 '공갈'을 치고 있다. 야, 니들 과거 삼당합당 시절처럼 또 당해보고 싶어? 겁나지? 니들 고립된단 말야... 겁을 내란 말이야. 자, 그러니 적당히 하고 얼른 장내로, 국회로 들어와. 그래서 미디어법도 잘 타협해서 처리하고... 어때, 형님이 이렇게 걱정해주시는데, 눈물 나도록 고맙지? 노무현 봐라, 형님한테 개기더니 결국 부엉이바위에서 몸 날리는 거 봐라... 니들도 그 꼴 되기 싫으면 형님 말씀 잘 듣고, 알아서 기란 말야...

강천석이 말하고 싶은 것은 대충 이런 거다.

강천석 아니 조선일보는 이번 삼당합당 시도가 그다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성공할 가능성도 과거에 비해서는 낮고, 설혹 성공한다 해도 그 후유증이 상당히 클 것이라는 점을 예상하고 있다. 그래서 저런 공갈을 때리는 것이다. 민주당이 겁 먹고 들어오면 제일 해피한 결과가 된다. 김대중 영감이 눈엣 가시이기는 하지만, 요즘 영향력도 옛날 같지 않고 무엇보다도 건강 상태를 봐도 그다지 오래 살 것 같지는 않다... 그럼 민주당 남은 무리들 요리하는 것이야 애들 팔목 비틀기라는 계산을 끝낸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의 이번 공갈이 먹혀들까? 그럴 수도 있다. 민주당이 조선일보의 공갈에 넘어갈 경우 이명박은 확실하게 정국 주도권을 쥐고 임기 말까지 별 무리없이 4대강도 죽이고, 남북관계도 죽이고, 호남도 짓밟고... 하고 싶은 짓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아마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본다.

결론 : 민주당은 공갈에 넘어가지 마라. 버텨라. 버티다가 다 죽을 것 같다고? 그래도 버텨라. 여기에는 그래도 희망이 있다. 반면, 버티지 않아도 결국 죽는다. 버티다가 죽으면 '그래도 버티다가 죽었다'는 소리라도 들을 텐데, 버티지도 않으면 '버티지도 못하고 그냥 스스로 알아서 뒈졌다'는 소리를 듣는다. 여기에는 전혀 희망이 없다.

강요할 생각은 없다. 선택은 니들 몫이다.

by 구오스 | 2009/07/11 01:06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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